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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진혜
평론 고연수
갤러리 TY

 

< 슬픔으로 구상된 아름다운 풍경 >


아름,다움 
  나의 의지가 있기 전, 본래 완벽하게 구성되고 운행되어 왔던 이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나 일상을 보내며 삶을 꾸려나가는 이 자체가 참 경이로운 일이다.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기 위해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깨닫게 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도 있다. 
시간의 흐름대로 생성과 소멸이 순환되는 생태계는 머리로는 습득한 자연의 이치라 하더라도 어김없이 그 시기와 그 시간에 정직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꽃과 달을 보며 사시사철 달라지는 감정과 상념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어떻게 저런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이 원래 존재했던 흐름대로 변함없이 가녀린 모습으로도 강한 생명력을 뿜을 수 있을까, 인간의 머리로는 셈하기도 힘든 저 시간 너머로 지구의 곁을 맴도는 단 하나의 위성인 달은 지구의 생명력이 꺼지지 않도록 초연히 적정거리를 지켜 운행하고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곳에 위치하고 그런 모습인 이유는 본연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인간이 살기에 최적으로 구성된 안락하고도 유일한 보금자리이고 이 안에서 모든 것이 서로의 영향으로 생이 이어지고 있다는 기적 같은 물리적 공식을 약소하게나마 인지한 이후 이들을 바라보면 그저 더 신비로울 뿐이다. 후천적으로 쌓은 지식과 경험의 깊이와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세상을 이루는 자연을 가만히 관조하다 보면 마음을 울리고 일렁이게 하는 경험의 유무는 경중이 있을지언정 보편적 감성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인데 아는 만큼 보이고 그만큼 느끼고 느낌이 깊어질수록 더 알고 싶은 것 역시 당연한 이치이진 않을까. 그들이 아름답게-시각적으로-보이는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것이 얽힌 생태계 안에 각자 생존하기 위한 최상의 적합한 방식으로 살아남은 현상이라는 것, 그곳에 ‘아름다움’을 인간이 부여해 형상화한 것이다. 
자연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인간이 만들어 낸 창작물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동요도 있다. 무용수의 몸짓,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때론 소용돌이치도록 헤집어놓기도 하는 음악의 선율, 중첩된 색면色面이나 병치된 배색配色만으로도 겸허와 숭고함을 느낀다든가 선과 면이 물감의 질감과 물성으로 찐득하고 녹진하게 엉겨 형용하기 힘든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추상회화를 직관했을 때, 오직 대상과 나만이 통하는 내밀한 주관적 감정의 교류와 동화가 일어나는 것인데 이때는 아름답다는 말 이상의 표현을 찾지 못해 아쉬울 정도인 초월적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연다움, 안정적인 조화로움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과 만족, 기쁨을 아름다움의 구성요소라고 담백하게 정의한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은 결국 인간이 대상에게 부여하고 그 대상으로부터 좋은 가치를 추출하고 추상하고 구성하는 복잡미묘한 과정인 것이다. 시각예술이 사실적 재현의 임무에 충실했을 때, 자연과 예술에서 지각되어지는 아름다움의 경로는 동일하거나 비슷하게 느끼고 간주되었을 것인데, 시각예술이 회화적 진심과 진실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리적-기제의 구분은 더는 불가피해졌을 것이다. 자연으로부터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잘라버린 추상미술은 캔버스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구상미술은 캔버스 안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슬픔이 구상된 아름다움

“저의 작품은 구상화에요. 
감정이 부풀어 오를 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그에 상응했을 때 그 순간, 아, 그 순간을 못 놓치겠어요.
설레고 흥분 되서 빨리 작업할 수밖에 없어요. 내 감정과 상을 통해 결국 추상 아닌 구상을 하는 거죠.

그 상을 빌려 내 마음을 토로해요.”
-작가 정진혜 인터뷰 중-

 작가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작품과 작업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국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담백하게 작가가 추려낸 몇 마디 말로 그의 작업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다. 
그의 초기 작업들을 보면 어두움 속에 실체가 파묻혀 거의 식별이 불가할 정도에 엄숙한 분위기이다. 깊숙이 보려는 시선으로 유심히 작품을 봐야 간신히 형상이 눈이 잡히는 <자화상>(2004년)이나 생기 있고 밝은 꽃의 향긋한 생명력을 어둠으로 침식시키려는 듯한 <개화>(2004년)는 어둡다 못해 축축하고 눅눅한 느낌이다. <붉은 어느 하루>(2005년)에서는 붉은 꽃의 형상들이 아름다워 보이기보다는 어두움 속에서 강렬하게 그 존재를 발하고 있는 느낌에 가까워 묵직한 기운이 엄습한다. 2008년부터 작품들은 이전보다는 조금 밝아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어두움은 드리워져 있다. 2009년 <빛의 환영> 시리즈들은 환한 빛을 발하는 자연의 풍경이 아닌 찬란한 꽃들과 자연의 풍광이 짙은 어둠을 품고 있는 듯해 작품명을 무색하게도 만든다. 무엇보다 실제로 밝은 톤의 작품들 <Autumn>(2010년), <Summer perfume>(2010년), <마음을 걷다-달맞이꽃 지는 자리>(2011년) 등은 화사한 노란색이 풍요롭게 뒤덮힌 작품들인데도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가 짙어 흥미로운데, 이는 작가 정진혜 작품의 기저가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의 깊이는 이후 작가의 어두운 색으로 다채롭게 그 감정이 스며들었다가 다시 풍겨 나온다. 2014년 작품들은 아픔, 외로움, 고독 등 어둡다고 간주하는 감정의 요소들이 다양한 색으로 발하는데, 꽃과 별과 달의 형상으로 깊은 어둠을 품은 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모두 실재하는 듯 보이나 실은 실재하지 않는, 슬픔으로 구상된 자연이자 풍경이다.
<Self Portrait>시리즈는 작가 본인의 모습인 자화상인 듯 보이지만 전적으로 인물에만 중심을 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감히 생략된 인물의 표정과 뭉개진 몸의 제스츄어, 주로 돌려 앉아 뒷모습만이 비치는 화폭 속 인물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물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 시점이 정확히 어디쯤 다다르는지는 여인의 모습과 함께 모호해지면서 소실된다.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여인의 모습과 포개어 중첩되며, 과감하게 재단된 구도 속 꽃을 바라보고 있는 -여전히 표정은 알 수 없지만-여인의 앞모습과 표정보다도 그가 응시하고 있는 지점이 어디쯤인지가 더 궁금해진다. 그래서 작가의 자화상 시리즈의 작품들은 보는 이에 의해 각기 달리 보이는, 결국 작가의 자화상이 아닌 작품을 보는 이의 자아상인 것이다.
꽃 그림으로 유명한 조지아 오키프와 알렉스 카츠의 작품은 꽃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비대하게 확대하거나 내지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꽃의 이면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으나, 분명 실재하는 꽃의 형상임에도 바라보는 우리 시선과 마음이 예상치 못한 궤도로 흘러버리도록 방치해 둔다는 지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연의 꽃에서 묻어나 충분히 느끼는 평온한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분명히 꽃으로 보이는 꽃으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시각과 시선은 어느샌가 색다른 감상과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다. 인체의 일부로 보이는 착시나 형상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의 감정이 피어오르기도 하는. 평면화임을 오히려 부각시켜 납작하게 펴 바른 단순하게 조형화한 꽃의 몸짓에선 자연을 마주할 때보다도 더욱 찬란한 경험을 하길 바라는 예술가들의 원대한 포부는 그렇게 신비롭도록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프리다 칼로,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 에바 헤세 등 예술가들의 구상화된 작품들은 ‘슬픔’이란 감정이 부드럽고 은유적이게 또는 매우 강한 직설적 화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도, 또는 쓸쓸함과 고독이 함께 응집되고 품어져 인간이 가진 본성 중 하나의 감정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에 가능성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설득한다. 인간이 서로의 본성에 대해 교감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깊은 성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형식이든 인간의 역사 속에 존재해야 하는 강력한 당위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슬픔, 그 아름다운 풍경
어두운 색감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작가 정진혜의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지만, 작품에 시선을 오래도록 두게 되면 차갑고 쓸쓸하고 고독한 기운에 이내 마음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밝고 경쾌한 조화로운 선과 색들로 구성된 추상 작품이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유쾌함이 시각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시각적 즐거움이자 큰 힘이기도 하기에 서슴없이 이런 작품들에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쉬우나, 끝을 가늠하기 힘든 아득히 깊어 보이는 작가 정진혜의 작품에선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그의 작품을 관조하게 되면 어둠 속 서서히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꽃이기도 별이기도 작가의 눈물이기도 한 작지만 빛나는 미물들이다. 어둠 속에 그 빛들은 어둠을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어둠 속이기에 더욱더 작지만 찬란히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어디선가 있을법하고 봄 직한 작품 속 풍광은 실재하는 경치가 아닌 작가 심상의 풍경이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들은 작품 속 깊이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몰입하게 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반짝이고 슬픔이 짙을수록 찬연한 빛은 우리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이 반짝이지만 어둡고 깊이 침잠되지만 에너지가 충만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그 작품을 좋게 보는 이유는 그 작품이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무언가를 얻었다면 이는 그 예술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탐구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응해 언제라도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망각, 희망의 소실, 존엄 추구, 자기 이해의 어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같은 우리의 약점을 얼마나 보완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좋거나 나쁘게 여겨질 것이다.”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중-

작가 정진혜의 작품이 깊은 슬픔을 머금고 있다고 해도 한없이 슬픔의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도 깊이 몰입될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의 깊이를 담담한 그의 구상의 언어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듯 실재하지 않는 그의 심상의 풍경, 그 경계선에서 긴장감을 내포한 채 슬픔을 그만의 깊은 색으로 품위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가 기품 있게 조성하고 있는 슬픔의 깊이가 타진될수록 더욱 깊이 몰입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쾌하지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부정적으로 간주하는-인간의 본성이 예술이기에 가능한 품위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스며들어와 성찰하게 하는 것, 작가 정진혜의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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