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SEOULIM 연우재 포스터 regard (수정본).png

괜찮지 않은 감정과의 조우.

글. 전시해설가 김찬용

 

     “괜찮아 잘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괜찮아 잘될 거야. 우린 널 의심치 않아.”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슈퍼스타>란 제목을 가진 이 노래는 팬데믹 시대에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는 따듯한 곡으로 많은 공익광고와 근래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OST로 사용된 곡이다. 희망의 메시지로 타인을 위로한다는 게 선하고 아름다운 행위임은 분명하다. 다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은 “괜찮아 잘될 거야.”라는 한마디로 위로받기엔 너무 무거운 상처로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에게는 막연한 희망 예찬 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공감이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마치 르누아르가 보여주는 행복의 색채와 뭉크가 보여주는 우울의 색채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말을 걸며 각자의 매력으로 위로를 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본 작가 임서우의 삶은, ‘그림’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이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상처들이 뒤섞여 있었다. 정신적, 신체적, 물질적 고난과 한계 속에서도 절대 붓을 놓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색채로 뿜어내는 임서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처절하게도 그리는 행위를 사랑했던 반 고흐가 떠오른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두 예술가에게 ‘그림’은, 주어진 고난을 버텨내는 버팀목인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둘의 궤적은 일견 닮아 보인다. 아마도 1882년 반 고흐가 그린 <슬픔>과 2021년 임서우가 그린 <슬픔>이 100여년의 시간을 건너 작품으로써 서로 교감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반 고흐에게 그러했듯 임서우가 그림을 통해 토해낸 감정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직시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며, 그 결과물들을 통해 같은 혹은 닮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래서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색채로 표현된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감상자 스스로는 망각하고 있었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되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이 말을 건다.

 

     “전혀 괜찮지 않다고. 많이 힘들다고.”

     임서우가 보여주는 이러한 감정들은 분명 마주하기 어렵고 힘든 감정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면하지 않고 바라봐야 할 우리 내면의 감정들이기도 하다. 이미 미술에서 막연한 예쁨과 행복으로 위로하는 시대는 한 세기 전에 끝나버리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임서우의 작품은 예쁘게 포장된 우울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내면을 짚어낸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표현주의란 생각이 든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각자의 심연을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임서우의 ‘그림’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이제 작가와 작품은 준비를 마쳤으니, 이 글을 통해 ‘괜찮지 않은 감정과 조우’ 할 준비가 되었다면, 직접 대면해 그녀의 ‘그림’과 대화해 보길 바란다.

bottom of page